금. 8월 8th, 2025

⛽️ 1973년, 기름 한 방울이 세상을 멈췄다: 제1차 오일 쇼크 완전 정복 프롤로그: 모든 것이 풍요롭던 시대의 끝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멎은 후, 서방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기’ 또는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이라 불렀습니다. 경제는 쉼 없이 성장했고, 중산층은 두터워졌으며, 교외의 넓은 주택과 차고의 자동차는 풍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보이지 않는 동력원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하고, 마치 무한할 것처럼 보였던 석유였습니다. 이 시대에 석유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적 전제이자, 서구적 삶의 방식을 떠받치는 기반이었습니다. 1960년대 내내 유가는 배럴당 1.80달러 수준에 머물렀고,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실질 가격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1969년 미국인들은 10년 전보다 더 싼값에 석유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격 환경은 석유가 공기나 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집단적 믿음, 즉 ‘풍요의 이데올로기’를 낳았습니다. 거대한 엔진을 단 자동차, 드넓은 교외 지역, 대량 생산-대량 소비 시스템은 모두 이 믿음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번영의 이면에서는 거대한 취약성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던 미국의 국내 석유 생산량은 1970년에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늘어나는 자동차와 공장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미국은 점점 더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에서 1973년 사이, 불과 3년 만에 미국의 원유 수입량은 거의 두 배로 급증하여 하루 620만 배럴에 달했습니다. 세계 경제의 심장이 값싼 중동의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가 완성된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풍요로운 시대는 사실상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이었습니다. 그리고 1973년 10월, 중동의 사막에서 불어온 전쟁의 바람은 이 성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됩니다. 그 충격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넘어, 풍요 속에서 자라난 한 세대의 세계관 자체를 무너뜨리는 실존적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전쟁의 불씨, 석유를 무기로 만들다 🔥 1973년의 위기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두 개의 거대한 흐름이 충돌하며 발생한 폭발이었습니다. 하나는 중동의 해묵은 갈등이 빚어낸 ‘욤 키푸르 전쟁’이라는 정치적 도화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유국들이 경제적 주권을 되찾기 위해 결성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라는 경제적 힘이었습니다. 전쟁은 이 힘을 사용할 완벽한 명분을 제공했고, 인류는 처음으로 석유가 단순한 연료가 아닌 강력한 지정학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4차 중동전쟁: 계산된 기습 1973년 10월 6일, 유대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욤 키푸르)’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며 제4차 중동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명절을 맞아 국경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노린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영토, 즉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연전연승에 도취해 있던 이스라엘 지도부는 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보내는 전쟁 신호를 허풍이나 ‘양치기 소년’의 외침으로 치부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아랍군은 과거와 달랐습니다. 소련으로부터 공급받은 최신예 SA-6 지대공 미사일과 새거(Sagger) 대전차 미사일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공군과 기갑부대의 우위를 순식간에 무력화시켰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개전 48시간 만에 17개 여단이 전멸하는 등 파멸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6일 전쟁’의 영웅이었던 모셰 다얀 국방장관조차 골다 메이어 총리에게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조건부 항복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할 정도였습니다. 석유 무기가 모습을 드러내다 전쟁이 격화되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군사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아랍 산유국들에게 행동에 나설 결정적 명분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1960년, 서구의 거대 석유 기업들(세븐 시스터스)이 일방적으로 유가를 인하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OPEC이 창설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10여 년간 자신들의 가장 귀중한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칼을 갈아왔습니다. 욤 키푸르 전쟁은 그 칼을 뽑아들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일부 분석가들은 전쟁이 유가 인상과 석유 산업 국유화의 명분을 제공했을 뿐, 석유 위기 자체는 산유국과 서구 석유 메이저 간의 힘겨루기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랍 지도자들에게 석유 금수 조치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보복인 동시에, 국내의 정치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대중을 결집시키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행동은 신속하고 단호했습니다. 위기의 전개 과정은 아래 타임라인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자료: 불과 3개월 만에 유가는 4배나 폭등했습니다. ‘황금의 물’이었던 석유는 순식간에 ‘공포의 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오일 쇼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격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자원을 가진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세계 경제의 대동맥을 틀어쥘 수 있음을 보여준, ‘자원 민족주의’의 시대가 개막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세계 경제를 덮치다 📉 오일 쇼크가 촉발한 유가 폭등은 전 세계 경제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바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입니다. 이는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경제 성장은 멈추는데 물가만 끝없이 오르는 최악의 상황을 말합니다. 이 끔찍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연쇄 반응을 통해 발생했습니다. 첫째, 석유는 모든 산업의 혈액과도 같았기에, 유가 상승은 곧바로 모든 제품의 생산 비용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기업들은 이 비용을 소비자 가격에 전가했고,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둘째, 치솟는 물가는 가계의 실질 소득을 감소시켜 사람들의 지갑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소비가 위축되자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생산을 감축했으며, 이는 경기 침체와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닥치자, 각국 정부는 정책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돈을 풀면 인플레이션이 악화되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돈줄을 조이면 경기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일상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미국: 주유소에는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이 몇 블록씩 줄을 섰고, ‘휘발유 없음(No Gas)’ 팻말이 내걸리기 일쑤였습니다. 정부는 연료 절약을 위해 전국적으로 자동차 제한 속도를 시속 55마일(약 88km)로 낮추는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영국: 전력난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상업 시설의 전력 사용을 주 3일로 제한하는 ‘주 3일 근무제’를 강제했습니다. 일본: 자원 빈국이었던 일본은 충격이 더욱 컸습니다. 시민들은 불안감에 화장지, 비누, 설탕 등 생필품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패닉 바잉’에 휩싸였습니다. 프랑스: 이 충격은 프랑스의 전후 황금기였던 ‘영광의 30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이 남긴 가장 깊은 상처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경제학의 주류를 이루던 케인스주의는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은 반비례 관계(필립스 곡선)에 있어, 정부가 재정 지출을 통해 경기를 조절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은 이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기존 경제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그 지적인 공백을 파고든 것이 바로 밀턴 프리드먼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였습니다. 이들은 정부 개입 대신 자유 시장, 규제 완화, 통화량 관리를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1973년의 오일 쇼크는 케인스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이후 40년간 세계를 지배하게 될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기 속의 대한민국: 잿더미에서 ‘중동 붐’으로 🇰🇷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특히 더 큰 충격에 직면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자원 하나 없는 나라가 ‘수출입국’과 ‘중화학공업 육성’이라는 기치 아래 막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시점이었기에,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구조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벼랑 끝에 선 나라 오일 쇼크의 충격파는 한국 경제를 정면으로 강타했습니다. 유가 폭등은 곧바로 수입 물가 급등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내 모든 제품의 가격 인상으로 번졌습니다. 불황 속에서 물가만 치솟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고, 경제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되고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와 경인에너지(현 SK인천석유화학) 같은 주요 정유사들의 공장 가동률은 50~70%대로 뚝 떨어졌습니다. 서민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유류 값과 전기요금이 오르자 관련 제품 가격이 최고 48%까지 인상된다는 발표가 나오자, 사람들은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같은 생필품을 리어카나 용달차로 사들이는 ‘사재기’에 나섰습니다. 버스 요금 인상설에 미리 토큰을 사두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는 진풍경도 벌어졌습니다. 정부는 “같이 고생하여 난국을 타개한다”는 구호 아래 에너지 절약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광고판 불 끄기 등을 시행하며 국민들의 허리띠 졸라매기를 독려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정책은 좌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중동 붐’이라는 역전의 기회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위기의 진원지였던 중동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 산유국들은 이 돈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할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도로, 항만, 신도시 등)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 거대한 사업을 수행할 기술과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은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부족했지만, 한국에는 ‘사람’이라는 가장 강력한 자원이 있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중동 건설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근면하고 숙련된 한국의 건설 노동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파견되었고, 한국 기업들은 놀라운 속도로 건설 계약을 따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1973년 1억 7,4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중동 지역 건설 수주액은 불과 5년 뒤인 1978년에는 81억 달러로 무려 46배나 폭증했습니다. 이른바 ‘중동 붐’이 시작된 것입니다. 중동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폭등한 석유 대금을 결제하고도 남아, 한국 경제의 숨통을 틔워주는 생명수 역할을 했습니다. 건설사들은 주식 시장의 ‘주도주’로 떠올랐고, 1977년에는 증시 거래 대금의 20%를 건설주가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이 ‘중동 붐’은 단순한 경제적 성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잿더미 위에서 일어선 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하나의 거대한 국민적 성공 체험이었습니다. 전쟁과 가난을 겪었던 세대가 사막의 열기 속에서 흘린 땀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하면 된다’는 강한 긍지를 새겨 넣었습니다. 위기의 원인을 기회로 전환시킨 이 놀라운 경험은 이후 한국이 수많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오일 쇼크가 영원히 바꾼 것들 🌍 1973년의 충격은 일시적인 경제 위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운영체제를 영구적으로 바꿔놓은 구조적 전환의 계기였습니다. 에너지에 대한 개념,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자원을 둘러싼 국제 정치의 문법이 모두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새로 쓰였습니다. 새로운 에너지 질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탄생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해 세계를 뒤흔드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본 서방 선진국들은 OPEC에 대항할 힘의 균형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1974년 미국 주도하에 주요 석유 소비국들이 뭉쳐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창설했습니다. IEA의 핵심 임무는 ‘에너지 안보’의 확립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가장 강력한 장치가 바로 ‘전략 비축유(Strategic Petroleum Reserve, SPR)’ 제도였습니다. IEA 회원국들은 의무적으로 자국의 전년도 하루 평균 순수입량의 90일분에 해당하는 석유를 비축해야 합니다. 이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공급 차질에 대비한 일종의 ‘에너지 보험’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도입은 에너지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까지 석유가 주로 민간 기업들이 거래하는 ‘상품’이었다면, 1973년 이후로는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통제해야 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자 ‘국가 안보’의 영역으로 격상된 것입니다. 에너지 정책은 외교 및 국방 정책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동차 혁명: 디트로이트의 몰락, 일본의 부상 오일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또 다른 분야는 자동차 산업이었습니다. 크고, 강력하고, 기름을 많이 먹는 ‘가스 거슬러(gas-guzzler)’로 대표되던 미국 자동차의 황금시대는 하룻밤 사이에 막을 내렸습니다. 머슬카와 거대한 세단은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절박하게 연비 좋은 차를 찾기 시작했고, 이 변화의 파도에 가장 완벽하게 올라탄 것은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었습니다. 도요타, 닛산, 혼다와 같은 기업들은 이미 자국 시장의 특성상 작고, 효율적이며, 고장이 적은 엔진을 개발하는 데 수년간 공을 들여온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차는 갑자기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미덕을 갖춘 상품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시장의 지각 변동이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 일본 차 판매량은 200% 이상 급증한 반면, 미국 업체들의 판매량은 30% 가까이 급감했습니다. 도요타와 닛산은 미국 수입차 시장 1, 2위를 차지했고, 특히 혼다가 개발한 저공해 고효율 CVCC 엔진을 장착한 ‘시빅’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힘센 차’를 선호하던 미국 소비자들의 인식이 ‘작고 효율적인 차’로 영구적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패권을 디트로이트에서 일본으로 넘겨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원 민족주의의 서막 1973년의 위기는 ‘자원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한 국가가 보유한 천연자원은 그 국가의 주권에 속하며, 이를 외교적,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OPEC의 성공은 석유뿐만 아니라 다른 핵심 자원을 보유한 국가들에게도 강력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로써 자원을 둘러싼 국가 간의 갈등과 협력은 국제 관계의 새로운 핵심 변수로 떠올랐고, 글로벌 무역과 외교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에필로그: 50년 전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1973년의 오일 쇼크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이 사건은 현대 세계화 시스템이 겪은 첫 번째 거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였으며, 에너지 의존성, 공급망의 취약성, 경제적 상호의존의 무기화라는 문제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면에서 1973년의 유령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 변화: 오일 쇼크는 원자력, 태양광 등 대체 에너지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후 변화 대응이라는 더 큰 과제 속에서 에너지 전환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석유 안보를 위해 탄생한 IEA는 이제 녹색 기술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의 공급망 안보를 새로운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에너지 안보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지정경제학적 갈등의 시대: 1973년 아랍 국가들이 석유를 무기로 사용한 것은 현대 지정경제학(Geoeconomics) 갈등의 원형과도 같습니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통제하고, 중국이 희토류를 전략 자원화하며,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망을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모습은 모두 1973년의 데자뷔입니다. 핵심 공급망에 대한 통제력이 곧 국가 권력이라는 교훈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효율성에서 회복탄력성으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경제는 ‘적시생산(Just-in-Time)’으로 대표되는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1973년의 오일 쇼크와 최근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시스템이 얼마나 외부 충격에 취약한지를 고통스럽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제 세계는 효율성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위기에 견딜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핵심 품목의 재고를 비축하는 전략 비축유의 원리는 이제 모든 산업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세계는 1973년만큼 중동 석유에 의존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사이 반도체, 희토류, 식량 등 더 복잡하고 새로운 의존성을 만들어냈습니다. 50년 전의 오일 쇼크는 우리에게 번영의 기반이 생각보다 훨씬 취약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위기가 던졌던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도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번영의 원천인 동시에 파괴적 무기가 될 수 있는 이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항해해야 하는가? 그 해답을 찾는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참고 자료

  1. 석유 파동 (r319 판)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4%9D%EC%9C%A0%20%ED%8C%8C%EB%8F%99?uuid=a1a67bf0-a3fe-4784-9ab3-5c687c17e97a 2. 1973년 석유 파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1973%EB%85%84_%EC%84%9D%EC%9C%A0_%ED%8C%8C%EB%8F%99 3. 50주년 맞은 욤키푸르 전쟁의 교훈 – 주간조선 – 조선일보,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9107 4. 욤 키푸르 전쟁 – 미주 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231011/1484817 5. 【역사 속 에너지】 제1차 오일쇼크 불러온 이-팔 전쟁, https://www.energy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4969 6. 욤키푸르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A%A4%ED%82%A4%ED%91%B8%EB%A5%B4_%EC%A0%84%EC%9F%81 7. 오일쇼크 – 똑스, https://www.dokdok.co/knowledge/oil-shock 8. 석유전쟁⑨…1973 오일쇼크, 석유파워 시프트 – 아틀라스뉴스, http://www.atlasnew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2705 9. 석유무기화’하면 의례 1973년 10월의 ‘석유수출금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근세 역사에 있어서 정치적 무기로서 석유를 이용한 사례는 여러 국가에서 수 많은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어느 다른 국가보다도 빈번하게 석유금수조치를 취해왔다. 2차세계대전 직전 일본에 대하여, 그리고 1960년대에 구소련에 대하여, 또한 지난 20여년 기간동안에 남아프리카, 버어마, 세르비아, 하이티, 리비아, 이라크, 이란, 수단 등에 대한 석유금수조치 등이 그 사례이다. 주로 미국의 동맹국들인 아랍산유국들이 서방국가에 대하여 석유무기화를 사용한 것은 1956년, 1967년, 그리고 1973년의 일이다. 1967년과 1973년의 경우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하여 대외 정책을 바꾸도록 압박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1967년 전쟁 이후 장악하고 있는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인 2002년 3월에 팔레스타인 예닌 난민캠프에 무력 진입한, http://oil2.petroleum.or.kr/program/cons/print.php?id=390 10.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경제·산업 > 석유파동,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gasoline.do 11. 오늘의역사 (10월 17일) – 아카이브조선 소사(상세), https://history.chosun.com/history/popup.jsp?id=20000417_0021 12. 석유파동(石油波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181 13. 석유 파동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4%9D%EC%9C%A0%20%ED%8C%8C%EB%8F%99 14. 11화 [경제위기란?-11]1970년대 석유파동 – 브런치, https://brunch.co.kr/@kys401/74 15. 1970년대 석유파동 사태 –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photo-archives/view/00755398 16. 오일쇼크가 대한민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 GS칼텍스 미디어허브, https://gscaltexmediahub.com/energy/the-impact-of-oil-shock-on-the-korean-economy/ 17. 1970년대 석유파동 – 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0270&code=kc_age_50 18. www.knoc.co.kr, https://www.knoc.co.kr/upload/EBOOK/sabo/190/sub07.jsp#:~:text=1973%EB%85%84%201%EC%B0%A8%20%EC%84%9D%EC%9C%A0,%EA%B8%B0%EA%B5%AC%EB%A1%9C%20%EC%84%A4%EB%A6%BD%ED%95%9C%20%EA%B2%83%EC%9D%B4%EB%8B%A4. 19. 국제에너지기구(IEA)의당면과제와 대응방향 – 에너지경제연구원, https://www.keei.re.kr/keei/download/focus/ef1303/ef1303_30.pdf 20. 국제 에너지 기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C%A0%9C_%EC%97%90%EB%84%88%EC%A7%80_%EA%B8%B0%EA%B5%AC 21. 국제에너지기구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5%AD%EC%A0%9C%EC%97%90%EB%84%88%EC%A7%80%EA%B8%B0%EA%B5%AC 22.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전략 비축유 방출 – 한국석유공사, https://www.knoc.co.kr/upload/EBOOK/sabo/190/sub07.jsp 23. 자동차/역사 (r20 판)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E%90%EB%8F%99%EC%B0%A8/%EC%97%AD%EC%82%AC?uuid=71c5aa28-37f7-4bcb-8e39-f4133ca307fd 24. 전기차 시대에 뒤처진 일본차, 앞으로의 미래는 1/3 –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g/highres/contents/220422191755444Kp 25. ‘어게인1973’?…오일쇼크 사례로 보는 오늘 날의 에너지 대란 – 임팩트온, http://www.impacton.net/news/articleView.html?idxno=3701 26. 1970년대 에너지 위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1970%EB%85%84%EB%8C%80_%EC%97%90%EB%84%88%EC%A7%80_%EC%9C%84%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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